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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전 사춘기가 지워진 묵시론

기사입력 2023.05.15 17:57 이경헌 기자 khun5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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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어느덧 5.18 민주화 운동도 43주기로 접어들었다. 80년의 5월에 전남고 학생회장이었던 이성우(61세, 서울 거주)를 만났다.

       

    광주에는 대학교가 2개 밖에 없었던 터라 고등학생인 우리에게도 일정 부분 역할이 필요했고,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시국 토론도 하고 또한 고3이라 입시 준비도 하면서 10대의 마지막을 혼란과 진통 속에서 보내고 있었다고" 했다.

     

    시국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980년 5월 15일 전국 최초로 고등학교 휴교령이 내려졌다. 학교를 포위하던 전투경찰들의 저지선을 돌파하며 도청 광장으로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을 철폐하라!”를 외치며 진출했다.

     

    5월 17일 전남대에서 부상자가 속출했다는 소식과 계엄군의 부당함에 맞서서 교련복을 입은 친구들은 돌맹이를 던지며 시위를 이어나갔고, 5월 20일 금남로는 피로 물들었으며, 이에 저항하는 광주시민들과 학생들이 공수부대와 싸우면서, 이 과정에서 친구들의 사망 소식도 들려오고 국민을 지켜줘야 하는 국민의 군대가 시민을 위해서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은 젊은 우리의 가치관에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43년이 훌쩍 지나갔지만, 목이 잠기면서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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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시민들과 친구들이 총을 들고 싸우면서 도청이 진압되고, 대학입시라는 압박감으로 도서관을 향했고, “당시 학생회장 신분이었던 이성우씨는 수배 중이고, 학교를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결국 5월 27일에 체포되어 상무대 헌병대에 수감 되고, 결론을 정해놓고 자백을 강요하면서, 저항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하고 정신을 잃고, 또 자백을 강요하고 이런 일상을 반복하며 63일이 지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고, 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학교에 가보니 “구속 기간이 결석으로 처리되어 졸업할 수 없다며 교장 선생님은 고개를 떨구시며 제적을 통보하셨다.”고 한다.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고, 광주를 떠나 검정고시를 준비해서 합격하였으나, 선생님들이 전남고 출신으로 졸업시키고 싶다고 아버지와 저를 설득하여 결국 이듬해 복학하여 후배들과 고3을 함께하며 고등학교를 4년을 다녔다고 했다. "졸업 30주년 때 당시 은사님들께서 ‘명예 졸업장’을 주실 때 만감이 교차했다고" 회고했다.

       

    수 많은 정치인들이 5.18 민주화를 정치화 하여 동지들을 이용하고, 난립한 시민단체가 마치 자기들이 이룩한 것처럼 이념과 사상을 거짓 대변하고 진정성을 상실하고 있다. 물론 5.18 단체 안에서도 순수한 이념을 망각하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질풍노도의 10대와 20대를 보내며 내 인생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43년이 지난 지금도 5.18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과 폄훼가 남아있어 ‘5.18 민주유공자증’을 꺼내기가 망설여지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막내인 내가 61세인데, 선배 동지들은 살아갈 날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희망이 있다면, 명예가 회복되고, 우리가 피 흘리며 추구했던 이념과 사상을 후배들이 이어받아 미래 대한민국을 위해 밝고 희망차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이끌어 주었으면 합니다. 43년 전 상황이 다시 온다면 그때의 결연한 젊은이로 자리할 것입니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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