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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지지 않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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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잊혀지지 않는 여인

청야 칼럼

명재 윤증 선생 – 잊혀 지지 않는 여인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잊혀 지지 않는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당시 겪었던 사건의 충격의 정도에 비례하여 그 기억도 장단(長短)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만남이 어느 한 인생의 삶을 송두리째 결정했다고 한다면 그 만남은 전 인생을 두고 절대로 잊혀 지지 않으리라.

 

 

 

 

 

 

 


당시 그 여인을 만났을 때는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80년대 초 서슬 퍼런 전두환 군사독재시대였다. 모든 경찰과 군인, 그리고 공무원, 사이비 시민단체들, 그리고 대다수 무지한 시민들조차도 이 정권의 충실한 감시자가 되어 어디에서라도 함부로 전두환을 욕할 수 없었을 만큼 살벌한 군사독재시대였으니 말이다.(박정희를 욕하면 무조건 때려 죽어야할 빨갱이가 되었듯이 전두환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위가 감시자요 고발자들이 득실거리던 시대였으니 숨소리 한번 크게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상하다고 짐작된 주변의 그렇고 그런 수많은 인간들이 모두 감시자(프락치)였던 것만 같다. 살육의 일제시대, 피비린내 나는 6.25, 이승만, 박정희 독재시대를 거쳐 신군부라고 일컫는 전두환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독재자가 정국을 장악했으니, 더구나 광주에서의 끔찍한 학살을 딛고 장악했으니 그 시대가 얼마나 살벌했던가는 가슴에 타오르는 한조각 의분을 품고 그들을 적대시하며 숨죽이고 살아온 자들은 다 알 것이다. 물론 그들에 빌붙어 자신이 가진 쥐꼬리같은 자리를 지키며 그것만을 신장시키는 데나 주력하며 호의호식하며 개돼지처럼 살아온 자들이야 그 시대의 아픔은 한갓 공상소설에나 등장하는 먼 나라의 이야기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때 대학에서 한국사상사를 공부하였는데 지금은 타계한지 오래 되었지만 그때 담당교수가 조선의 사상을 이끌었던 유학자들의 묘소나 고택(古宅)을 순례하는 전국 여행을 단행했다. 술이나 마시고 낭만을 즐긴답시고 노는 데나 골몰하는 시시껄렁한 대학의 답사여행은 거의 한 번도 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는 합류하게 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과 묘소를 그때 가보게 되었고 또 충청남도 논산에 있는 윤증 선생의 고택도 그때 처음 가보게 되었다.

 

지금도 가슴 속에 잊혀 지지 않는 그녀를 만난 것은 바로 그 윤증 선생 고택에서였다.

 

 

 

 

 

 

 

이 이야기를 마저 하려면 먼저 조선의 유학자 명재 윤증 선생에 대하여 알아야겠다.

 

명재 윤증은 인조대인 1629년에 태어나서 효종, 현종대를 거쳐 숙종대인 1714년까지 살다간 당시 소론의 영수로서 재야의 정치를 이끌었던 조선의 이름난 선비다. 윤증은 20여 차례나 왕이 벼슬을 내리며 불렀는데도 단 한 차례도 그에 응하지 않았다. 물론 과거시험도 응시하지 않았다. 81세에 우의정을 제수하며 숙종이 정사를 함께 논하자고 불렀는데도 응하지 않아 백의정승이란 칭호를 얻었다. 죽어서는 자신의 무덤에 비석도 세우지 말고 일체의 비문도 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그런 윤증은 자신에게도 철저했다. 86 평생을 살면서 아침에 일어나 손수 빗자루를 들고 방과 마루를 쓸었고 혼자 있어도 어려운 손님을 맞은 듯이 단정하게 옷을 입고 바르게 앉아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또 노소귀천(老少貴賤)을 가리지 않고 정성껏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그런 인품의 선생이었으니 집안의 동절(冬節-겨울에 낳아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가 보다)이라는 여종이 죽고 제사를 지낼 아들이 없자 기력이 남아있던 85세 때까지 그 여종의 제사를 손수 지내주었다고 한다.

 

 

 

 

 

 

 

한평생 벼슬길을 사양하고 오직 학문 연구에만 몰두했던 윤증은 당시 서인의 거두인 스승 송시열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끝내는 다투다가 결별하게 된다. 이는 아버지 윤선거로 인한 것이었다.

 

윤증은 9세에 어머니를 잃게 된다. 청나라 군대가 쳐들어오는 병자호란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어머니 공주 이씨와 누이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신한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는 강화도를 점령하고 만다. 이때 어머니 공주 이씨가 목을 매고 자결한다. 청나라 병사에게 욕을 보는 수모를 겪느니 스스로 자결함으로써 자신을 지켰던 것이다. 거기 피신해 있던 사대부들은 자결로써 청나라에 저항했던 것이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도 친구 권순장, 김익겸과 함께 청군이 쳐들어오면 의병을 일으켜 분연히 싸우다 순절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조선군이 손 한번 쓸 새도 없이 청군이 밀려와 강화도 성을 점령해 버렸다. 이때 순절을 약속했던 두 친구는 김상용이 분신하자 이어서 순절했다. 그러나 윤선거는 죽지 않고 침원군 이세완과 함께 강화도를 탈출한다.

 

이는 훗날 아버지 윤선거가 죽고 윤증이 스승 송시열에게 묘비명을 부탁했을 때 송시열은 ‘친구와 부인이 모두 순절했는데 윤선거가 혼자 살아나온 것은 내 덕이 부족하여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 고 썼다. 윤증이 죽은 자에 대한 예가 아니라며 이를 고쳐줄 것을 요구하자 송시열이 끝내 거절했다. 이로써 회덕(懷德)에 사는 스승 송시열과 이산(泥山)에 사는 제자 윤증이 서로 반목하게 되었는데 이를 세간에서는 ‘회니 논쟁’이라고 한다.

 

 

 

 

 

 

 

송시열은 당시의 남인인 유학자 윤휴가 주자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들고 나오자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이를 비난하며 동문수학한 친구 윤선거와 충남 강경에 세워진 황산서원에서 만나 여러 유림들과 마주한 자리에서 논쟁 끝에 ‘주자가 옳으냐? 윤휴가 옳으냐?’라고 극단적인 질문을 던진다. 윤선거는 남인인 윤휴가 주자를 달리 해석할 수 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는 주자학을 조선의 모든 통치 수단으로 여겼던 송시열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자칫 말을 잘못했다가는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윤선거는 ‘주자가 양(陽)이라면 윤휴는 음(陰)이다.’는 말로 대신한다. 훗날 윤휴는 사문난적이라는 죄명으로 사형 당하고 만다.<독학으로 유학을 공부한 윤휴는 독자적인 주자학 해석을 열어 보이려 했으나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윤휴 또한 1636년 벼슬에 나아갈 마음으로 만언소를 초하였으나 병자호란의 참상을 보고 신하로서 부끄러움 때문에 벼슬길에 나가지 않을 것을 결심하고 38년 뒤 1674년 7월 청나라에서 오삼계의 반청 반란사건이 일어나자 비로소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고 대의소를 지어 왕에게 바치고 숙종이 즉위한 뒤 벼슬에 나간다. 이처럼 윤휴 또한 가슴 속에 나름의 깊은 철학을 지녔던 것이다.>

 

동문수학한 같은 서인이었으면서도 송시열과 윤선거는 생각의 차이가 있었고, 아버지이자 학문적 스승인 윤선거와 29세 때 스승 김집의 권유로 송시열에게 주자대전을 배웠으니 송시열도 윤증에게는 엄연한 스승이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 윤선거의 강화도 사건으로 인한 묘비명 문제, 윤휴의 사문난적과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 스승 송시열은 제자 윤증을 깊이 의심하게 된다.

 

결국 윤증은 ‘의리쌍행 왕패병용(義利雙行 王覇竝用)’ 즉 대인의 의와 소인의 이익을 함께 행하고, 왕도와 패도를 같이 쓴다고 스승 송시열을 비난하기에 이르렀고, 경신환국, 허새의 옥사 같은 사건에서 윤증은 스승 송시열과 입장을 달리한 것이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윤증은 스승을 배반한 파렴치한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게 된다.

 

 

 

 

 


거기에다 스승 유계가 지은 가례원류를 몰래 그의 부친 윤선거와 함께 쓴 것으로 만들려 했다고 유계의 손자 유상기가 화를 내며 윤증에게 절교 편지를 보냈다는 내용이 ‘숙종실록’에 남아있으니 이를 본다면 그야말로 윤증은 유림에서 비난 받아야 마땅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노론의 입장에 섰던 사관이 기록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물론 윤증 또한 아버지 윤선거의 강화도 사건과 매사에 이기기를 좋아하는 당시 주자학의 거봉 스승 송시열 간에 인간적인 고뇌가 깊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윤증 또한 스스로 넘어서서는 안 될 천륜이 있음을 알고 아버지 윤선거에 대한 지극한 효를 자식으로서 다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송시열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송시열 또한 치열한 주자학자로서 그것이 종국에는 유배와 죽음을 몰고 올지라도 언제나 자신의 신념과 견해에 솔직 담백했다.<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낳은 원자(훗날 경종)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이때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송시열은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한양으로 압송되는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후대에 송시열을 위시한 노론은 주자학적 의리론과 명분론을 중시하며 현실과의 일정한 타협을 통한 권력지향적인 측면이 강했다고 한다면,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은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명분을 고수하면서 개혁 정치를 펼치려는 무실학풍(務實學風)의 측면이 강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버지 윤선거로 인한 사제지간의 반목과 세간의 비판을 뒤로 하고 학문에만 몰두하는 윤증을 숙종이 여러 차례 경연에 나오도록 불렀으나 모두 사양했다. 그러나 숙종이 계속해서 부르자 1683년 숙종 9년 과천 나량좌의 집까지 갔다가 마중 나온 박새채를 만나 자신이 출사할 수 없는 이유를 말한다. 그때 윤증이 박새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개인적 사정 이외에 조정에 나가서는 안 될 이유가 세 가지 있다. 그 첫째가 우암 송시열의 세도가 변해야 한다. 두 번째,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해소되어 서로 화해해야 한다. 세 번째, 삼척(三戚 - 김석주<숙종의 모후 명성황후의 사촌 오라비> 김만기<숙종의 장인>, 민관중)의 문호가 닫혀져야 한다. 우리의 역량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가? 그것을 할 수 없을 것 같으므로 나는 조정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윤증이 벼슬을 거부한 까닭은 당시 세도를 누리고 있는 세력에 대한 척결과 원한으로 얽힌 서인과 남인이 서로 화해를 하지 않는 한 세상이 좋아질 수 없다고 판단했고 자신은 그것을 할 수 없기에 출사 할 수 없다는 분명한 자기 입장을 가지고 그것을 끝끝내 지켰던 것이다. 이게 이른바 윤증의 3대 명분론이다. 윤증은 부패세력에 대한 단호한 척결과 정치세력간의 화해를 주장한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박새채는 두 말하지 않고 돌아갔다고 한다. <요즈음 정부의 요직 하나 차지하려고 똥 냄새 펄펄 나는 인간들이 청문회에서 아무 소신도 없이 앵무새처럼 떠벌이는 것을 보면 참으로 구역질이 날 지경인데 말이다.>

 

실학자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극찬했던 윤증 선생이 86세로 세상을 떠나자 숙종은 ‘유림에서는 그의 도덕을 존경하고 나 또한 그를 흠모했네. 평생에 얼굴 한번 못 보았는데 죽었다는 소식 들으니 더욱 한스럽구나.’ 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2300명이나 되는 조선의 선비들이 충청남도 논산 윤증 선생의 집까지 먼 길을 와서 문상을 했다고 하니 이는 윤증 선생의 고매한 인품과 학덕이 당시 어찌 했는가를 짐작 하고도 남는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이러한 윤증 선생의 고택에서 나는 잊을 수 없는 한 여인을 만났던 것이다.<윤증 선생은 제자들이 돈을 모아 지어준 이 훌륭한 고택에 들어 살기를 차마 거부했다고 한다. 다른 허름한 초가집에서 살다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녀는 초로의 늙은 할머니였다. 시골 밭일을 막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하여 돌아온 듯한 할머니는 마루 위에 모인 젊은 대학생들을 무덤덤하게 맞이하였다. 

 

“할머니, 이 집 며느리로 들어와 윤증 선생 고택을 지켜 오시는 소감이 어떠시나요?”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

 

“지금 세상이 어느 세상이야! 우리는 공무원 같은 것은 안 해! 다 회사에 나가거나 일 하거나 장사해서 먹고 살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뜸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그저 일상에 찌들어 사는 그런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할머니는 ‘현미밥에 거친 옷을 입는 것이 분수에 맞다고 여기면서 집안의 여인들에게 비단옷을 절대로 입지 못하게’ 했던 윤증 선생의 사상과 삶을 가슴에 안고 시대를 바라보면서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선비집안의 강직함을 가슴에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할머니는 왕이 내린 벼슬을 20차례나 거부한 윤증 선생의 고택을 지킬만한 분이었다. 그 할머니는 아마도 그때 이렇게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야! 이 개새끼들아! 지금이 어느 시대냐! 남북 분단의 시대에다 전두환이 같은 포악한 살인학살자가 다스리는 세상 아니냐! 거기 빌붙어서 밥술이나 뜨고 학자랍시고 교수랍시고 거들먹거리며 사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 백성의 피 같은 관록을 챙겨먹으면서 감히 명재 윤증 선생을 입에 담을 수 있어! 일국의 정승자리도 초개같이 걷어찼어! 이놈들아! 그깟 대학에서 저런 교수 밑에서 뭘 배우고 있니! 썩 꺼져! 이 녀석들아!”

 

시대를 불문코 무슨 얄팍한 재주를 부려 크나큰 권력에 지위나 넘보고 살아가는 작자들이나 제법 그럴싸한 학벌이나 무슨 사짜를 훈장처럼 들고 교만하게 거들먹거리는 인간들을 보면 정신없는 날 파리 같은 가련한 인간들은 그에게 굽실거리겠지만, 일국의 정승 자리를 일언지하에 거부한 명재 윤증 선생의 눈으로 보면 온갖 피비린내 나는 협잡과 탐욕과 음모로 분탕 칠한 그런 나라에서 권력에 의한 탐욕으로 외적을 지키라고 준 그 총으로 생사람을 억울하게 무수히 몰아 죽여 권력을 장악한 그런 자 밑에서 무슨 학자라고 지위 내밀고 밥술깨나 뜬다고 거만하고 교만하게 구는 인종들을 보면 얼마나 가련하고 우스운 일이겠는가 말이다. 실로 오뉴월 똥통에 썩은 똥을 파먹자고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저 똥파리들이나 진배없을 것이었다. 

 

세상은 용기와 힘이 있어 부정한 것에 저항하여 그것을 극복하고 성취하는 자가 있는 반면 스스로 가슴 깊이 자신의 힘의 한계를 인식하고 뜻을 지키며 사는 부류가 있다. 저항 할 줄 아는 자는 꺾이기도 하겠지만 뜻을 지키고 재야에 숨어 소리 없이 살 줄 아는 자는 절대 꺾이지 않는 것이다. 그 씨앗이 결국 언젠가는 싹이 터서 한 세상을 견인해 내기도 하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여느 시골 할머니와 같았지만 그 할머니는 그냥 여느 할머니가 아니었다. 명재 윤증 선생의 고택을 지키는 카랑카랑한 선비의 불꽃같은 강직한 청죽의 정신을 가슴에 지닌, 지고지순한 덕을 지닌 할머니였던 것이다. 그런 분을 무엇으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 감히 칼로 지위로 권력으로 돈으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 

 

 

 

 

 

 

 

 

남보다 비교하여 조금 더 뭘 가졌다고, 조금 뭘 이루어냈다고 절대로 교만하지마라!

용(龍)은 땅과 물에 살면서 땅과 물의 이치를 경험으로 깨달아 안 다음에라야 비로소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다. 거북(龜-자라)은 물과 땅의 섭리를 깨달아 알았지만 승천하지 않고 진흙구렁 그곳에서 그냥 머물러 산다. 그러나 봉(鳳)은 땅과 물의 섭리를 깨달아 알지도 못했으면서 오직 날개를 가진 덕분으로 하늘로 승천하여 지상을 굽어보며 산다.

 

그러나 땅과 물의 섭리를 모두 깨달은 용의 경지에 이르러야 세상은 비로소 올바로 다스려지는 것이다. 땅과 물의 섭리를 알았어도 스스로 승천하여 천하를 다스리려하지 않는 거북은 큰 덕을 지닌 재야의 인자(仁者)다. 그러나 봉은 부러 곱고 억센 날개 덕분으로 승천한다. 이는 좋은 왕실 같은 곳에서 태어난 세자나 공주를 일컫는다. 세상의 이치를 전혀 깨달아 알지 못했어도 그 가계의 혈통만으로 부모의 은덕과 집안의 재력만으로 흙과 물에 손발 한번 안 묻히고 곱게 자라 하늘에 승천하여 세상을 다스리고 산다.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요즈음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세상과 인생사의 여러 고통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한심한 작자들이 오직 과외 선생 비싸게 사서 영어 수학 공부만 잘해서 내로라는 좋은 대학 졸업장에 유학 박사 사가지고 와서, 아니 그깟 공부 못해도 부모 잘 만나 고운 날개를 달고 세상을 주무르고 다스리는 큰 자리들을 차지하고 앉아있으니 이는 어쩌면 봉이 하늘에 승천하여 세상을 희롱하는 것과 같다하겠다.

 

그러니 한갓 가난한 사람들이 하는 함바집 밥장사 자리를 거래하는 대가로 그 돈 몇 푼을 후려 먹고 한 나라의 경찰청장을 지낸 강희락이 구속되고, 장관까지 지낸 대학 총장 임상규가 자살했다고 하니 이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나라에서 높이 배운 지식인에다가 고관대작인 이들의 이 일면만 보더라도 지금 이 세상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기에 국회의원 장사나 시장군수 장사나 떡 장사나 그림 장사나 글 장사나 말 장사나 법 장사나 학벌 장사나 종교의 천국에 극락 장사 같은 교활한 장사치들이 돈만 벌면 목에 힘주고 마치 천하를 다 얻은 양 개폼 재며 으스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워리!’ 하고 부르며 돼지뼈다귀나 뜨건 국밥에 술 몇 잔, 돈 몇 닢 던져주면 저 죽을지 모르는 개새끼 떼들이 떼로 우르르 몰려드니 말이다.

 

 

 

 

 

 

나는 지금도 그 할머니의 느닷없는 일갈에 얼굴 표정이 자신도 모르게 변하던 고인(故人)이 된 그 교수의 표정을 잊지 않고 있다. 이 시대가 주는 도무지 지탱 할 수 없는 중압감에 가슴이 뜨끔 했던 것이리라. 그것은 비단 한국사상을 공부한다는 그 교수만의 삶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 지식인 아니 국민 모두의 삶의 문제였던 것이다.

 

명재 윤증 선생 고택에 가서 그때 만난 그 할머니는 두고두고 내 인생의 가장 정면에서 지금도 외치고 있다. 그것이 조선을 조선되게 했던 우리가 일제시대와 군사독재시대를 거치면서 그리고 이 신자유주의 황금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깡그리 잃어 버렸던 선비정신이라고 말이다.

 

물론 명재 윤증 선생이야 대가 집 양반가에서 태어나 먹고 살아갈 문제는 전혀 걱정할 것 없이 학문에만 매진할 수 있었겠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내가 그 정신을 동경했던 대가로 치러야 했던 고통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참으로 커다란 것이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가 까마득한 날에 벌써 가랑이 찢어지고 인생은 송두리째 바닥에 떨어져 깨진 유리병처럼 흩어져 온통 밑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위대한 인간의 경지를 열어 보여주었던 명재 윤증 선생과 그 고택에서 만난 몇 세대 후손인 그 집을 지키고 사는 며느리인 할머니의 경험이 이 암울한 시대에 얼마나 커다란 위안인가!

 

당나라 최고의 시인 이백이 황학루(黃鶴樓)에 올라 그 풍경에 반해 시 한편을 지으려다가 마침 황학루 담 벽에 써져있는 이 시를 보고 감탄하면서 붓을 내던져버렸다는 최호의 시 황학루를 감상하면서 한 시대를 나름대로 투철하게 살다간 명재 윤증 선생과 그 할머니의 회억(回憶)에 젖어본다.

 

 

 

 

 


옛사람은 이미 황학 타고 떠났으매
이곳에는 부질없이 황학루만 남았구나
황학은 한번 가서 다시 오지 않거니
흰 구름만 천년동안 유유히 떠있노라.

한양수는 맑은 강에 력력히 비껴있고
앵무주엔 꽃향기풀 그윽히 우거졌네
날은 저물어 가는데 고향은 어디런고?
안개 낀 강우에서 향수에 젖었노라

                                             <황학루, 최호- 당시감상사전 김택 역, 원문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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