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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능(惠能)과 육조단경(六祖壇經)<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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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혜능(惠能)과 육조단경(六祖壇經)<4>

부처님 오신날 참 부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다<기념 특집 칼럼>

혜능(惠能)과 육조단경(六祖壇經)<4>

 

 

스승 홍인에게 가사와 법을 받고 야밤에 남쪽을 향해 떠난 혜능이 두어 달여 만에 대유령 고개에 이르렀는데, 쫓아오던 사람들은 반쯤 쫓아오다가 포기하고 모두 돌아갔다. 그러나 오직 한사람만 돌아가지 않고 끈질기게 혜능을 쫓고 있었다. 진씨 성을 가진 혜명이었다. 그의 조상은 삼품장군을 지낸 사람으로 성품과 행동이 몹시 거칠고 포악했다.

 

혜명은 대유령 고갯마루까지 쫓아와 바로 혜능을 덮치려했다.

 

 

 

 

 

 

 

 

혜능은 덮치려는 혜명에게 가사를 돌려주었다. 스승 홍인이 준 조사의 증표인 가사를 혜능은 왜 돌려주었을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갓 천조각인 가사에 얽매어 스승이 내린 참된 가르침을 받아 전하고 중생을 구제하라는 실질적인 내용을 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깟 천조각인 가사에 집착하다가 목숨을 잃고 아무런 일도 해내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나 세상은 자신이 틀어쥔 지위와 돈을 지키기 위해 온갖 유치한 수작을 부리다가 결국 자신의 목숨을 포함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한심한 족속들을 우리는 종종 만나게 된다. 실질적인 삶보다도 자신을 굴레 지워주는 허울뿐인 외적인 지위와 명예와 돈을 좇아 살며 그 허명을 온몸에 훈장처럼 두르고 도시고 까불며 집착하는 소인배들의 숱한 더러운 작태는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 직업이 무엇이고를 떠나 우리들의 삶속에 빈번하게 일어난다. 참으로 어리석은 인종들의 추저분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혜능이 순순히 가사를 내어주자 혜명은 참으로 의외의 말을 한다.

 

“제가 일부러 멀리 온 것은 법(진리)을 구함이요. 그 가사가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혜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얼마나 아름다운 혜명의 말인가! 한갓 천조각인 가사라는 외향보다도 내면의 정신적인 실재가 무엇인가를 들어 알려는 집념이 혜능을 쫓아 끝까지 그를 여기까지 이르게 한 것이었다. 지위와 돈, 명예와 권력이라는 외적인 것에 집착하여 국민을 학살하고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는 그렇고 그런 악마 같은 인종들과는 전혀 다르게 혜명 또한 성현의 아름다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혜능은 고갯마루에서 즉시 법을 전했다. 혜명이 혜능의 말을 듣고 그 말끝에 마음이 열렸다. 아마도 혜능을 쫓아 법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달려온 그 의지가 스스로 닫힌 제 마음을 열게 한 것이었으리라. 혜능은 혜명으로 하여금 북쪽으로 돌아가서 법을 전하여 중생들을 교화하라고 당부한다.

 

지위보다도 돈보다도 명예보다도 권력보다도 남이 깨닫지 못한 바를 깨달아 알아 미혹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고 참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그 깨달음의 빛은 실재로 세상의 어느 금은보화보다도 더욱 값지다는 것을 눈 밝고 귀 밝은 성현들은 깊이 깨달아 알고 있었기에 학살과 살육의 대 권력자들이 천하를 유린하는 혼탁한 시대에도 그 빛은 면면이 살아 인류의 삶의 등불로 밝게 빛났던 것이다. 모든 자신의 재주와 능력을 팔고 또 없는 재주와 능력과 세상의 값진 모든 단어들을 빙자하여 휘장처럼 찬란하게 자신을 두르고 매일 눈속임으로 연극을 하며 돈과 지위와 권력과 명예를 향해 달려가는 추저분한 속물들이 어느 시대에나 돈과 칼을 거머쥐고 썩어 문드러져 피 냄새를 사방에 풍기며 개판을 치는 것이었지만 묵묵히 인간의 길을 고민하며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몇몇 성현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세상은 지탱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혜능은 정혜일체(定惠一體)를 주장한다. 곧 정과 혜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지혜와 선정을 함께 함이 아니요. 마음과 말이 함께 착하여 안팎이 한가지면 선정과 지혜가 곧 함께 함이니라’며, ‘스스로 깨달아 수행함은 말로 다투는데 있지 않으며, 만약 앞뒤를 다투면 이는 곧 미혹한 사람으로서 이기고 지는 것을 끊지 못함이니 도리어 법집과 아집이 생겨 네 모양(四相-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을 버리지 못함이니라.’고 말한다.

 

이게 곧 혜능의 핵심사상이다. 몸과 마음, 마음과 행동의 일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온갖 좋은 것을 다 말하면서도 그 마음속에는 그 좋은 것을 이용해 자신의 지위와 돈과 명예와 권력을 노리고 있다고 한다면 이는 어떠하겠는가. 더구나 스스로 수행하여 참된 진리를 실천하려 하지는 않고 ‘내가 옳네! 네가 옳네!’ 하고 서로 의견 다툼만 일삼는다면 이는 또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오늘날 세상살이의 실상은 바로 혜능이 지적한 그대로다.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지만 실재로는 그 착함을 팔아 제 권력과 지위와 명예를 드높여 배를 불리고, 안다는 것에만 집착하여 상대를 이기려고 다툼만 일삼으며 실천 한 조각 없으니 말이다.

 

혜능은 당시 그러한 세태를 꼬집으면서 ‘어리석은 자는 복만 닦지 도는 닦지 않는다(愚人修福不修道)’고 꾸짖는다. 절이나 교회나 성당에 가서 자신이 믿는 성현이 말한 참된 인생의 도를 배우고 닦아 인간으로서 참된 선행을 실천하며 살아가려 하지는 않고, 수백 가지 이 핑계 저 핑계 따라붙은 엄청나게 긁어 들이는 수많은 염부돈 꼬박꼬박 갖다 바치며 아부, 아첨하면서 자신과 제 자식과 가족들의 살아 영원한 수복강녕(壽福康寧)과 입신출세(立身出世) 그리고 죽어 천국행(天國行)과 극락왕생(極樂往生)만을 신에게 애걸하며 구걸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추태인가. 이는 그러도록 가르치는 종교 지도자라는 인종들이나 소위 배워 안다는 지식인이라는 인종들 혹은 그럴싸한 지위 붙들어 잡고 앉아 거들먹거리는 모든 허울 좋은 직종의 쓸개 빠진 인종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면서 혜능은 또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는 앉아서 마음을 관찰하고 깨끗함을 관찰하되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고 가르치고 이것으로서 공부를 삼게 하는 것을 보나니, 미혹한 사람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문득 거기에 집착하여 전도됨이 수백 가지이니, 이렇게 도를 가르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애써 알아야 하느니라.’며, ‘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음이 옳다고 한다면 사리불이 숲속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유마힐이 꾸짖었음이 합당하지 않느니라.’고 말한다.

 

이는 곧 실천을 혜능은 말하고 있음이다. 머리 깎고 평생을 선방에 들어앉아서 참선한다고 마음을 찾는다며 밥이나 축내고 있거나 예배당에 앉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기도한답시고 예배드린답시고 폭발적인 열정을 불사르는 데는 으뜸이나 막상 그들 성현이 가르친 지혜나 선행의 참다운 실천 한 조각 없는 모양새를 보면 참으로 그 해악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세상과 역사는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삶 속에서 깨달은 지혜를 목숨을 걸고 실천하는 것이 곧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이지 세상의 온갖 일 즉 생산적인 일(힘든 노동)을 피해 숲속 같은 절간이나 예배당이나 성당에 숨어 사는 것처럼 위장하고는 아비규환의 생활현장에서 매일 피땀 흘려 일하는 중생(신도)들이 가져다주는 피 같은 돈이나 밥을 공으로 날름날름 받아먹으면서 고급 승용차 굴리고 살면서 하는 일이 고작 절집이나 교회나 성당이나 짓자고 선동하고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은 무조건 사탄이네, 마구니네, 죽어 지옥 갈 놈이네 하고 곧 잡아 죽일 듯이 심한 욕을 하면서 가만히 앉아 참선하네, 기도하네 하고 오래 앉아있기 경주나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혜능은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실상 이들은 혹세무민하는 간악한 기생충이 아니고 무엇인가!)

 

혜능은 ‘법에는 단번에 깨달음과 점차로 깨달음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영리하고 우둔함이 있으니, 미혹하면 점차로 계합하고 깨달은 이는 단번에 닦느니라.’며, ‘만약 점차로 수행하여 부처를 찾는다면 어디서 참됨을 구할지 모르는 도다. 만약 자기 몸 가운데 본래로 참됨이 있다면 그 참됨 있음이 바로 성불하는 씨앗이니라. 스스로 참됨을 구하지 않고 밖으로 부처를 찾으면, 가서 찾는 모두가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로다. 돈교(頓敎)의 법문을 이제 남겼나니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고 모름지기 스스로 닦으라.’고 말한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깨달음은 오직 단번에 깨달아 아는 것만이 있는 것이다. 영리한자는 즉시 깨달아 알기도 하겠지만 미혹한자는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민하다 깨달을 때는 ‘오 그랬구나!’ 하고 단박에 깨달아 아는 것이었다. 깨달아 아는 것이 그러하다면 다음을 행(行)을 닦는 것, 곧 실천하느냐 못하느냐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기에 혜능은 이렇게 말한다. ‘한 생각의 악한 과보는 천년의 착함을 도리어 그치게 하고, 한 생각의 착한 과보는 천년의 악을 물리쳐 없애나니’ 이 얼마나 훌륭한 성찰인가! 우리는 종종 높은 지위에 오른 그럴듯한 사람이 추저분한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한순간에 나락으로 추락하는 뉴스를 종종 접하곤 한다. 지금껏 잘해왔는데 한순간의 악한 행위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사람의 삶인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온갖 악행을 일삼으며 살아온 사람이 어느 순간 착한 행동을 실천하며 모든 악을 물리쳐 없애기도 하는 것 또한 사람의 삶이다. 이는 곧 세상에는 악인도 선인도 따로 없음을 말함이고 또 매 순간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밝혀주는 말이다. 참으로 자신을 잘 제어하며 매 순간 순간을 참되고 진실하게 깨달아 알게 된 지혜와 선행을 실천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삶의 엄연한 진리를 혜능은 주지하고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누가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참된 삶을 구하여 살아가야지 밖으로 무언가에 의지해 참된 삶을 구걸하고 밖으로 의존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제약받기를 원한다면 이미 그런 삶 속에는 자신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찾아 밝혀 살려하지 않고 전지전능한 신이나 외부의 기이한 힘에 의존하여 의탁하여 살려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이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되 삶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고민해 보지도 않고 자신을 감싸고 흐르는 세상의 물결에 몸을 맡겨 살면서, 오직 감각적으로 요구되는 물질과 욕망에 자신을 내버려 표류시키면서 복락과 영생만을 기도하고 바라는 삶을 살아간다면 이 어찌 온전한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피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보다 영리하고 교활한 사람들에게 소중한 자신의 삶의 대부분을 유린당하면서도 그 유린당하는 것조차도 모르고 어항 속에 갇힌 금붕어처럼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잘될 것이며, 어찌 세상살이가 힘이 들지 않겠는가. 한갓 미물인 방안의 파리조차도 구애됨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진지한 물음 한번 던짐 없이 그저 맛나고 기름진 음식만을 찾아 배부르게 먹이를 먹으며 편리하고 안락하고 화려한 삶만을 감각적으로 쫓아 살면서 오직 자기가 믿는 신에게 복락과 영생만을 기도하고 바라며 산다는 것은 마치 개돼지처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삶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혜능은 이러한 개돼지 같은 삶을 사는 어리석고 천박한  사람도 ‘한 생각 깨달아 마음 평정하면 바로 중생이 스스로 부처’라고 말하고 있다. 요는 모든 생명이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권력 가진 것이나,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 상호 평등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 생각 깨달으면 빈부귀천에 얽매임 없이 숭앙해 마지않는 저 높은 절대의 경지에 오른 신, 곧 부처라고 말하는 것, 그것이 혜능이 깨달은 인류애이며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평등한 생명관인 것이다. 이러한 인류애와 평등한 생명관을 당시 신분이 엄격한 계급사회에서 과연 소통이 가능했을 것인가.

 

그러기에 ‘진리를 전하는 일은 목숨이 실낱에 달린 것과 같다.’고 스승 홍인은 말했던 것이다. 거대한 문자권력에 저항하여 문자도 모르는 애송이 혜능에게 조사 자리를 단번에 물려주었던 홍인이나 그 진리를 실천하기 위해 새로운 사상을 과감하게 열어젖힌 혜능이나 모두 한시대의 암흑을 깨뜨려 열어젖힌 위대한 사상가이자 동시에 혁명가인 것이다.

 

 

 

 

 

 

 

 

혜능은 염세적인 불교사상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마감한다. ‘음욕의 성품은 본래 몸의 깨끗한 씨앗이니, 음욕을 없애고는 깨끗한 성품의 몸도 없느니라(婬性本身淸淨因 除婬卽無淨性身)’ 동양으로 전래된 불교사상은 수많은 위대한 사상가들을 통해 새로운 사상으로 재해석을 통한 발전을 거듭한다(남의 사상과 문물을 수용하여 그 사상의 장단을 면밀히 파악해 모순을 극복하고 자기 역사와 사회와 인간 삶의 실정에 맞게  주체적으로 재창조해낸다. 비록 시초는 남의 것이었으나 재창조된 것은  결코 남의 것이 아니리라) 삶의 부정적인 시각을 통해 긍정적 삶의 진리를 터득하려한 불교는 이처럼 긍정적인 삶의 원형을 혜능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유학(儒學) 사상과도 통하는 역사의 개념이 발견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탄생과 소멸의 연속선상속에서 진행되는 인류의 역사에서 음욕이야말로 깨끗한 몸의 씨앗으로 파악한 혜능의 견해는 가히 당시 염세적인 불교적 세계관을 단번에 뒤집어 엎어버린 신선한 발견이며 선언이라 아니할 수 없다.(일체개고(一切皆苦),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생의 본질을 파악한 싯다르타를 뛰어넘는 생명(역사) 긍정 사상이 아닌가 싶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니,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니, 음욕이 깨끗한 성품의 몸이고 깨끗한 성품의 몸이 음욕이니.......!)

 

혜능은 따로 제자를 조사로 정해 가사와 법을 전하지 않았다. 요는 어느 한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지위와 권력을 대물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문자를 모르기에 육조단경을 구술해 제자 법해에게 기록해 전하게 하면서 ‘이 육조단경을 접해 읽고 참되게 행하는 이는 모두 조사요, 제자’라고 말한다.

 

 

 

 

 

 


자신이 가진 자리와 지위를 거래하고 대물림하여 추앙받고 또 받으려 아첨하고 몸 바치고 자존심 구기고 어여쁜 계집에 술에 밥에 진기한 보물에 온갖 뇌물 갖다 바치며 별의별 개수작을 다 부리며 표 얻으려 궁상떠는 정치꾼에 장관이네 법관이네 하는 고급관료에 소인배 모리배 같은 추저분한 소지를 일거에 제거해버리고 혜능은 만인에게 만인의 자리를 진리 그대로 온전히 물려주었던 것이다.

 

일흔여섯에 이승을 하직하기 전에 혜능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른다. ‘그대들은 잘 있거라. 이제 그대들과 작별하리라. 내가 떠난 뒤에 세속의 인정으로 슬피 울거나, 사람들의 조문과 돈과 비단을 받지 말며, 상복을 입지 말라. 그런 짓은 성인의 법이 아니며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고 하면서, ‘내가 떠난 뒤에 오직 법에 의지하여 수행하면 내가 있던 날과 한가지일 것이다. 내가 만약 세상에 있더라도 그대들이 가르침을 어기면 내가 있은들 이익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탄생은 소멸로 마감되고, 만나면 언젠가 헤어지는 게 세상사의 이치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눈물 없이 받아들일 일이다. 올 때 가난한 집안에 나무꾼 맨몸으로 와서, 또 갈 때 남길 것 없이 바람처럼 가는 것, 그러나 인류의 가슴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하나 매달고 가는 것, 그것이 참된 삶 아니겠는가!

 

 

 

 

 

 

 

6조 혜능 대사의 육신불(등신불) - 죽은 후 썩지않은 법신(시체)을 그대로 모시고 있다.

 

                                                                                                                                                                                    <끝>

 

 

 

  9산 선문 중 하나인 전남 장흥 보림사의 국보 제 117호 철조비로자나불 좌상(신라 헌안왕 2년 858년 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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