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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능(惠能)과 육조단경(六朝壇經)<3>

기사입력 2015.05.28 00:48 청야 기자 ysg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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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 오신날 참 부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다<기념 특집 칼럼>

    혜능(惠能)과 육조단경(六朝壇經)<3>

     

     

    혜능이 그에게 진실로 게송을 지었노라고 말하자 그는 서쪽 벽에다가 혜능의 게송을 글자로 옮겨 적어준다. 그 게송은 다음과 같다.

    菩提本無樹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明鏡亦無臺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佛性常淸淨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何處有塵埃 어느 곳에 티끌먼지 있으리오.

    다시 게송에 이르기를(又偈曰)

    心是菩提樹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身爲明鏡臺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明鏡本淸淨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何處染塵埃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

    이러한 혜능의 게송을 보고 절 안의 모든 대중들이 그 뜻을 알아보지 못하고 괴이하게 여겼다. 혜능은 그만 방앗간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스승 5조 홍인은 혜능이 적은 게송을 보게 된다. 그리고는 혜능이 큰 뜻을 깨달아 알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곧 그것은 홍인의 표현대로 하자면 혜능이 문안에 들어왔음을 말함이다. 

    여기에서 혜능의 게송을 신수의 게송과 따져 분석해 보자.

    신수는 몸이 보리 곧 지혜의 나무라고 보면서 마음이 밝은 거울 같다고 했다. 이는 몸을 근본으로 하고 그 몸에 마음이 의존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기에 마음을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끼지 않게 하여야한다고 끊임없는 수행을 강조한다.

    그와 반면 혜능은 보리 곧 지혜는 나무가 없으며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다고 했다. 이는 신수가 말한 몸도 마음도 어느 곳에도 의지체가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으며 부처의 성품이란 항상 깨끗하거니, 본질적으로 보리나 마음은 항상 깨끗한 것이니 티끌과 먼지가 있을 수 없다는 존재의 본질은 이것이다라고 확연히 탁 드러내놓는다. 그것은 외부의 조건이나 상황에 결코 물들 수 없는 마음의 실체를 혜능이 밝힘으로서 절대로 외부의 조건이나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깨끗한 결정체로서의 마음을 혜능이 지니고 있고 또한 그것을 본질적으로 지켜낼 수 있다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두 번째 게송에서는 신수와 완전히 견해를 달리한다. 신수가 파악한 몸과 마음의 본질은 산 아래에서 부지런히 한 발 한 발 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 성실한 태도(돈오점수 頓悟漸修)로서의 소견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혜능은 산 정상에 단박에 올라 먼 풍경을 한 눈에 죄다 내려다보고 그 본질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돈오돈수 頓悟頓修)이다. 그러기에 5조 홍인은 신수는 아직 문안에 들어오지 못한 소견을 지녔다고 한 것이다.

    혜능의 게송을 본 홍인은 혹여 혜능을 누군가 해칠까 두려워 다른 제자들에게 ‘이 게송 또한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산중의 대중이 모두 잠든 삼경에 이르러 혜능을 직접 찾아가 조사당 안으로 조용히 그를 부른다. 혜능은 스승 홍인이 자신을 부르자 의아해하며 스승을 따라 조사당으로 간다. 조사당 안에서 홍인은 혜능을 앉혀놓고 곧바로 금강경을 그에게 설한다. 혜능이 스승 홍인의 금강경에 대한 설명을 한번 듣고는 그 말끝에 바로 깨닫는다.

     

     

     

     

     

     

     

    홍인은 그날 밤 혜능에게 법을 전해준다. 그리고 단박에 깨닫는 법과 가사를 전해주며(便傳頓法及衣) 말한다.

    “그대가 6대 조사가 되었으니 가사로써 신표를 삼아 대대로 이어받아 서로 전하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여 마땅히 스스로 깨치도록 하라. (汝爲六代祖 衣將爲信 稟代代相傳 法以心傳心 當令自悟)”

     

     

                                                                                                                   6조 혜능대사 상

     


    참으로 혁명적인 일이다. 고작 방앗간에서 8개월 동안 방아나 찧고 있는 문자도 모르는 애송이에 불과한 혜능에게 그의 게송 한수를 보고서 당장에 6대 조사의 자리를 내리다니 이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홍인의 이러한 태도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한 말의 약속을 지켰을 뿐만아니라 참으로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 번째는 오랜 학문 연마와 수행을 통한 경륜을 지닌 선배라 할지라도 궁극을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조사의 자리를 주지 않은 홍인의 참다운 스승다움에 있다.<생각해보라. 교수사인 신수는 유학을 배우고 홍인 밑에서 오랫동안 수학을 한 요샛말로 하자면 일류대학 정규과정을 일등으로 졸업하고 박사 학위를 딴 자 아닌가. 그에 비하면 문자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혜능은 유치원에 들어온 지 고작 8개월 밖에 안 된 코흘리개 햇병아리 아닌가! 머리를 깎지도 않고 계도 받지 않은 신출내기 애송이가 스승의 대를 잇는 조사가 되다니 어디 상상이나 될 일인가.(위대한 큰사람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간혹 불교를 말하면 ‘머리도 안 깎고 참선도 안 해본 놈들이 아는 체 한다.’고 머리만 깎은 한심한 자들이 더러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머리 깎은 자신의 상을 드높이고 참선을 해본 것을 특별하게 과신하는 참으로 유치한 소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네 이놈! 과연 머리 깎고 오랫동안 참선하여 무엇을 깨달았는가? 어디 한번 내놓아 보아라! 중생들이 목말라 비틀어 죽어가는 이 아비규환의 세상에 고작 하는 것이 그 푸념이란 말이더냐? 수억만 번 머리 깎고 수억만 번 참선 한들 그따위 것 무엇하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깨닫고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말짱 헛일 아닌가!' 아마도 홍인이 그 말을 들으면 이렇게 호통을 치며 비웃을 것만 같다> 비록 방앗간에서 방아 찧는 일이나 하는 애송이일지라도 큰 진리를 깨달아 단박에 통달하였다고 한다면 그가 문자를 알든 모르든 간에(불립문자 不立文字) 그의 깨달음을 높이 평가해 주고 숭상해 줄줄 아는 그 기울임 없는 진실한 평등 정신에 있다.

    둘째로는 어려운 문자를 읽고 쓰고 해석하는데 능통하기에 문자를 통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그 문자에만 얽매어 있는 지배 권력(서열화 된 일류대학이라는 학력이나 문자 암기나 해독 창작능력으로 국가의 인재를 뽑는 고시나 시험 등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권력이나 권위)에 대한 허상을 백일하에 드러내 비판하고 그들의 허상을 거부해 버린 역사적인 일대사건이라는 점이다.(요는 홍인이 요샛말로 하자면 좋은 집안, 일등, 일류 대학, 해외 박사 이따위 화려한 외향보다도 형편없는 집안 출신에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 글자를 읽고 쓸줄 모르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사고력과 경험을 토대로 하는 실질적인 실력과 실천 능력을 가졌다면 나이뿐 아니라 모든 경력이나 상황이나 조건을 떠나 바로 그것이 최고라고 선언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고 그러한 자, 곧 신수가 아닌 혜능을 홍인은 자기를 잇는 후계자로 곧바로 선택한 것이 아닌가!) 문자를 장악하고 있는 왕족이나 귀족 그리고 소수 엘리트들은 불교경전을 읽고 해석할 줄 알고 익힐 수 있었기에 매일 그들의 복락과 극락왕생만을 빌며 그들만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문자 지배권력 중심의 당시 불교의 한계를 혁파하여 비록 문자도 모르고 손에 똥 두엄이나 묻히고 나무지게나 지는 일이나 하고 살아가는 평민이나 노예라 하더라도 크게 깨우치면 누구나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혁명적인 계급해방 사상을 열어젖힌 바로 그 점에 있다.

    홍인의 그 행위는 홍인이었기에 홍인만이 단행 할 수 있는 다시 생각해 보아도 참으로 위대한 일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모든 일체 사물을 평등한 눈으로 바라보는 바로 싯다르타의 사상과 정신을 홍인은 깊이 깨달아 알았기에 이러한 위대한 실천이 스스럼없이 나왔던 것이리라) 진리를 깨달아 습득하는 평등한 존재자로서의 제자에 대한 편견 없는 사랑과 문자습득과 해독 능력과 오랜 수행 과정과는 전혀 무관하게 불제자의 궁극적인 목적인 최상의 진리를 깨달은 자에 대한 그의 사심(私心) 없는 정직한 대접은 그가 참된 인간의 큰마음을 지닌 훌륭한 큰 스승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새 우리 사회를 보면 연줄과 집안 배경과 어느 대학을 졸업했는가? 어디에서 박사 학위를 땄는가에 따라 사람의 근수(斤數)가 달라지고 외국어 구사 능력에 따라 대접이 달라져서 너나 나나 모조리 영어권의 나라로 나가 수많은 달러를 써가면서 박사학위라도 하나 사서 주워들고 오려고 혈안이 되어버렸다. 외국의 그럴싸한 대학에서 영어네 독일어네 프랑스어네 뭐네 해가지고 무수한 경력 붙여서 그럴싸한 상표 들여 붙여달고 있지 않으면 그의 실질적 실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으니 그것을 붙여달려고 피 튀기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 교육의 궁극 목적이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다반사로 남의 논문을 표절하고 박사 학위를 달라고 담당 교수에게 온갖 뇌물을 갖다 바치고 아양 떨며 아부하고 어떠한 추저분한 방법을 동원 했든 박사 학위만 받으면 장관이든 교수든 뭐든 철밥통 자리 하나만 꿰차면 그로 끝이다. 결과만 있지 과정은 없는 세상이다. 그러고도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이 나라 교육계의 실상이다.<우리는 여기서 신정아 사건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영국 어느 대학의 박사라는 신정아는 그 대학 학위를 위조해 교수가 되었고 남들이 따르지 못할 실력을 소유한 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막상 알고 보니 신정아는 고졸이었고 그녀의 학력은 위조 되었다. 그렇다면 신정아의 뛰어나다는 실력은 무엇인가? 학력이 우수했기에 무조건 실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었던 것은 아닌가? 진짜 실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오로지 학력이 뛰어나면 실력도 뛰어나다고 보았으니 이 땅에는 뛰어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줄 아는 놈이 아무도 없거나, 아니면 신정아가 고졸이었지만 학력과 무관하게 실력이 매우 뛰어나거나 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실력도 그저 그런 것인데 학력 때문으로 볼 줄 모르는 놈들이 그 학력에 눌려 이구동성으로 뛰어나다고 입을 놀렸고 또 뛰어난 실력이란 게 실상은 어느 것인지 그 누구도 모르는 것이었겠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놀랍게도 그 바닥에는 이놈이나 저놈이나 모조리 진짜를 알아보는 눈은 한 놈도 없고, 진짜 실력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오로지 그곳에는 껍데기뿐인 학력과 거짓만으로 탐욕의 침을 질질 흘리는 허깨비들만이 저 잘났다고 위세부리며 지위를 차지하고 거만하게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신정아를 알고 보니 대학이며 박사학위 학력을 위조 했고 진실은 고졸이라고 여우같은 애에게 우리 모두가 속았다고 실력도 꽝이었다고 사기꾼이었다고 발로 뻥 차버린 것인가? 묻고 싶다. 정말 그랬단 말인가?>

     

    실제로 외국에 나가 박사학위 가지고 들어온 자들이 비싼 달러 쓴 만큼 우수한 실력을 지녔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배운 것만큼 그가 우리 사회에서 도시고 까불며 누리는 지위와 물질적 대접만큼 이 나라가 어려웠을 때나 위기에 봉착했을 때 남들보다 많이 배웠다는 지식인으로서, 우러러보는 만큼의 천재라는 그 칭송만큼 솔선수범하여 봉사하고 실천했는지는 참으로 모를 일이다. 군사독재다 뭐다하여 세상이 한참 어려웠을 때 열심히 자신의 입신출세만을 위하여 공부하여 그 유창한 외국어 구사능력으로 그 박사인가 뭔가 하는 것을 우리보다 잘사는 선진국이라는 대학에 가서 따와서 이 나라의 교수니 관리니 뭐니 하는 높은 자리에 오른 그 훌륭한 능력으로 오직 일신의 부귀영화만을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면 그 능력이란 게 도대체 이 사회에 무슨 소용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긴 실력이 있건 없건 무조건 제 자식에게 대를 물려 좋은 자리와 돈과 지위를 대물림하기 위하여 불법이든 비리든 따지지 않고 물불 가리지 않는 인종들이 개판을 치고 무슨 기독교에서는 목사란 자가 교회까지 자기 자식에게 떡하니 세습 한다고 하니 더 말해 무엇 하랴!

    더구나 종교를 빙자하여 그들 성인이 이 세상에 실현하려한 아름다운 세상 실현에는 눈곱만큼도 노력하지 않고 우리 사회에서 고위 공직자다 학자다 교수다 선생님이다 예술가다 문인이다 하여 먹고 살만한 자들이 괴이한 신비주의에 빠져 이상한 요술을 가르치고 행하는 종교인에게 현혹되어 백주대낮에 귀신을 보는 요술에 골몰하거나 손 안대고 수저를 구부리는 기이한 이적을 일으키는데나 평생을 골몰한다고 한다면 이는 얼마나 웃긴 일인가.

    박애와 사랑, 나눔이라는 인류의 중차대한 행복과 공동선에 대한 실현은 뒷전이고, 또한 이 세상에서 눈만 뜨면 벌어지고 있는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들의 참상에 대한 따뜻한 사랑 한 점 없이 죽은 귀신을 만나보았고 신을 보았다면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고(증명 할수 없기에 실재로 무엇을 보았는지 자기 자신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일이겠지만) 손 안대고 수저를 구부리는 요망한 일에나 전 생애를 바쳐 몰두한다고 한다면 바로 이러한 일이 종교를 빙자한 혹세무민(惑世誣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5조 홍인은 당시 요술이나 도술을 부리는 그런 기이한 능력을 시험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과거시험 같은 문자암송과 문자구사 능력을 시험한 것도 아니었다. 이는 곧 개인의 잔재주를 시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래로부터 세상이란 게 한심한 기득권 족속들의 장난으로 돌아간 지 오래고 보니 글재주, 그림 재주, 운동 재주, 이 재주, 저 재주 그러다 보니 아주 개 같은 재주까지 모조리 재주가 되고, 영어 수학 암기 능력, 외국어 구사 능력, 법전 암기 능력 등의 참으로 하찮은 시험을 치러 사람을 뽑는 그런 요망한 짓거리를 일삼는 짓으로 각계각층의 공직자나 정치가를 추려내고, 또 뒤로는 계집에 술사다 바치고 아부 잘하는 순서대로 가져오는 뭉치 돈의 무게에 따라 사람을 추려내 자리를 거래해 앉히다 보니 사람됨의 근간을 보는 시험은 없어진지 오래고 모조리 밥자리와 지위를 위한 남보다 더 영악하고 교활하게 탐욕스런 자들 순으로 뽑아 앉히게 되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하긴 홍인만큼 제자를 제대로 알아볼 줄 아는 훌륭한 스승도 더 이상 없고 또 혜능만큼 뛰어난 제자도 없어진지 오래서이겠지만, 그러다 보니 여기나 저기나 모조리 부정부패로 들끓는 악취가 진동하고 있다. 요즈음 민주화다 하여 조금은 그 냄새나는 통속이 정화되어 가는 조짐이 조금 보이나 근본적인 개혁이 있지 않고서야 어찌 그러한 추저분한 관행을 일시에 송두리째 뿌리 뽑을 수 있겠는가.

    5조 홍인은 6대 조사를 내린 혜능에게 다시 말한다.

    “혜능아. 옛날부터 법(진리)을 전함에 있어서 목숨은 실낱에 매달린 것과 같으니(自古傳法 命如懸絲), 만약 이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이곳을 빨리 떠나도록 하라.”

    얼마나 훌륭한 말인가! 진리를 전함에 있어서 목숨은 실낱에 매달린 것과 같다고 한 홍인의 이 말은 진리를 지키고 신장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더구나 풋내기 혜능에게 6대 조사를 내렸으니 정규 학교를 나오고 문자를 습득하고 오랫동안 수행해온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그를 가만 둘리 없었다. 오직 경륜과 얄팍한 문자해독 능력으로 자신의 위치를 세우려 들 그들이었으니 비록 진리를 깨달아 안 혜능이라고 하지만, 그 틈새에서 문자도 모르는 어찌 보면 허점투성이의 연약한 어린 혜능이 버텨날리 없었다. 홍인은 제자 혜능에 대하여 이토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었다.

    그 밤에 홍인은 제자 혜능을 몸소 구강역(九江驛) 나루까지 아무도 몰래 배웅하며 ‘법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서 삼년 동안은 법을 펴지 말고, 뒤에 미혹한 사람들을 교화하여 잘 지도하고 그가 깨달으면 너의 깨달음과 다름없는 것으로 여기라.’고 이른다.

     

     

     

     

     

     

    혜능이 떠나고 다음날 그 사실을 안 수 백 명의 제자들이 스승 홍인의 예견처럼 혜능을 해치고 가사와 법을 빼앗으려고 벌떼처럼 그의 뒤를 쫓아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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