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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능(惠能)과 육조단경(六祖壇經) <2>

기사입력 2015.05.26 20:46 청야 기자 ysg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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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 오신날 참 부처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다<기념 특집 칼럼>

    혜능(惠能)과 육조단경(六祖壇經) <2>

     

     

    홍인은 그 게송을 자세히 읽고 나서 화공 노진에게 말한다.

    “내가 돈 삼십 천을 주어 멀리서 공봉(화공 노진)이 온 것을 위로하겠다(與供奉錢三十千). 금강경(金剛經)에 말하기를 모든 모양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하였으니 변상은 그리지 않으리라.”

     

     

     

     

     

     

     

    홍인은 왜 그 벽에 그리기로 한 능가변상과 가사를 전수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고 하였을까. 그것은 바로 신수가 쓴 그 게송 때문이었다. 홍인은 이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이 게송을 그대로 두고 미혹한 사람들로 하여금 외우게 하여 행(行)을 닦아 삼악도(三惡道-地獄, 餓鬼, 畜生)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만 못한 것이라고 여기며 이 게송을 의지하여 닦으면 사람들에게 더 큰 이익이 될 것임을 생각했던 것이다.

    역시 아름다운 성현의 생각을 홍인은 한 것이다. 무릇 한심한 범인(凡人)들은 그곳에 화려한 채색의 그림을 그려 즐기려고 했을지 모르겠으나 홍인은 비록 그것도 제자들 중 누군가가 검은 먹물로 쓴 몇 구절 글자에 불과했지만 그 게송을 알아보았고 미혹한 사람들에게 이 게송을 가르쳐 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게 더욱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5조 홍인대사를 모시는 황매현의 오조사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다. 요즈음 보면 무슨 절이다, 교회다, 성당이다, 무어다 하여 각종 종교단체에서 수천억 금을 들여 여기 저기 뻔질나게 집 짓는 공사들을 하고 거기 돈 낸 사람 이름을 줄줄이 찬란한 황금물이나 돌비석에 단단히 새겨 박아놓고 과시하며 난리법석을 치르는데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종교가 지향하는 자비며 박애며 나눔에 대한 실천은 온데간데없고, 있다고 한들 종교를 빙자한 포교나 선교의 목적을 배면(背面)에 깔고 쥐 오줌 지리듯 실상보다도 선전만 요란한 속을 더러 보이곤 하는데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가끔 소일하러 가는 어느 절은 그 절집에 사는 사람이 오직 집 짓는 일에만 골몰했던지 급기야 국가에서 엄청난 금액의 세금을 지원받아 커다란 대웅전이니 뭐니 하고 집들을 번질나게 여러 채 지어놓았건만 일 년에 사용하는 사람은 고작 몇 십 명을 넘지 못하는데다가 사용기간도 서너 달도 채 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생각 건데 그 많은 돈을 들여 지은 집이 사용하는 사람 하나 없이 매일 텅텅 비어 쓸모없이 낡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곳에 그처럼 많은 돈을 투자해 놓았으니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낭비인가. 유치원, 고아원, 양로원, 의료사업, 교육, 농민, 노동자, 비정규직, 도시빈민 등 국민 대다수가 직접적으로 혜택을 보는 일에 전액을 다 투자해도 모자랄 판에 박애, 자비, 나눔이라는 성인의 이름을 걸고 사는 종교인이란 자들이 그들 성인의 이름을 빙자하여 여기 저기 국가기관이나 돈 많은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세금에 뭉치 돈을 얻어다 제 좋아 믿는 신(神)을 따른다는 사람들 몇 살아갈 일에나 골몰한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말이다.

    직접적으로 돈을 버는 생산적인 일은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이 좋은 최고급 외제 자동차 뻔질나게 굴리고 다니며 하는 일이라고는 자기들 몇몇 살아갈 수십억씩 들어가는 집이나 짓는 일에나 골몰한다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들이 섬기는 신(神)이 말하는 자비, 박애, 나눔이란 말인가. 거기다가 살아 무한한 개인적 복락을 바라서인지 죽어 천국이나 극락을 바라서인지 모를 그런 돈 낸 사람 이름 떡하니 돌이나 종 같은 쇠판에 깊이 새겨 놓고, 돈 많이 내는 사람 순서대로 등급을 매겨 허울뿐인 직책 나누어 주면서 깐에는 위대한 종교인 행세를 하는 꼴이라니 어찌 이 세상이 아수라장 판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종교인이란 자들이 그가 숭배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예수, 석가, 공자, 마호메트 등 이러한 성인들이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이 땅에 실현하고자한 평화롭고 아름다운 그 세상 실현에 실천적으로 살아가지는 않고 그(神)를 믿어(혹은 그(神)를 믿는다고 아부하여) 다만 현세의 영원무궁한 개인적 마음의 안식과 복락과 죽어서의 천국과 극락만을 맹목적으로 바란다고 한다면 또 그 개인적 안식과 복락과 극락과 천국만을 입버릇처럼 외며 믿음과 복종과 헌신과 헌납을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그들이 믿는 신이 추구해 마지않았던 박애며 자비며 나눔이었단 말인가.

    하긴 어떤 종교는 오직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만 가지고 무조건 사람을 네편, 내편으로 획일적으로 가르면서 천사 또는 악마 혹은 미래에 죽을 놈(죽어 지옥 갈 놈) 또는 살 놈(죽어 천국 갈 놈)으로 찢어 나누면서 한편으로는 그 가진 높은 직책이며 어마어마한 재산을 제 자식들에게 상속하느라 혈안이 되었다고 하니 가히 살아 현세의 무한한 안식과 복락부터 죽어 극락이나 천국, 지옥에 이르기까지 송두리째 틀어쥐고 있는 그들이 믿는 신이라는 그 신은 참으로 무섭고도 무서운 무시무시한 존재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당시 홍인은 그따위 짓에는 결코 골몰하지 않았다. 아니 그따위 짓의 허위를 사납게 나무라며 참된 종교인의 실천적 삶을 고민했던 것이다.

     

     

     

     

     

     

    홍인은 곧바로 제자들을 모조리 불러 그 게송 앞에 향을 사르게 하고 제자들에게 이 게송을 외우는 자는 장차 자성(自性)을 볼 것이고 또 의지하여 수행하면 타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른다.

    여기에서 홍인은 스승으로서의 훌륭한 면모를 보여준다. 비록 제자들 중 누군가 그 게송을 적어놓았을 것으로 알았겠지만 그렇게 적어놓은 그 게송에 대한 한량없는 칭찬과 대접을 할 줄 아는 큰 가슴을 가진 도량 있는 스승이었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정신적 진실을 새겨 보고 대접할 줄 아는 큰 사나이였던 것이다. 제 머리 좋아 공부 잘해 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부리거나 지시해서 먹고사는 직업을 가진 입법 사법 행정부의 관리며 정치가며 기업가며 학자며 교육자며 문학가며 예술가며 언론인이며 종교인이라고 깝죽대는 그런 족속이나, 진리에 대한 실천 한 조각 없이 제 가진 얄팍한 지식과 재주와 화려한 경력과 이력이나 과시하며 상전에 앉아 밑에 사람들에게 매사에 악다구니나 쓰고 으스대며 살아가는 그런 한심한 수준의 용렬한 탐욕스런 소인배 나부랭이에 홍인이 불과 했다고 한다면 그 즉시 그 게송은 지워져 사라져 버렸을 것이고 능가변상의 희미한 채색화만 오늘날 그 자리를 케케묵은 먼지 속에서 소리 없이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

    대부분의 우매하고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소인배들이 마구잡이로 농단하는 그런 참혹한 역사의 거친 격랑 속에서도 너무나도 드물게 간간이 그 역사는 사이사이에 보석 같은 크나큰 인물들을 그 천 길 낭떠러지 어둠 속에 숨겨두어 간혹 빛나게 하는 것이 또 인류 역사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긴 오늘날 진리며 정의며 평화며 민주며 민족이며 통일이며 자유며 교육이며 문학이며 문화며 예술이며 농민이며 노동자며 빈민이며 언론이며 건강이며 환경이며 종교며 스포츠며 세계화며 뭐며 값나가게 보이는 모든 것을 자기들 간판으로 떡하니 치켜들고 목소리 높여 나서는 이 판이나 저 판이나 막상 알고 보면 모조리 그 판이나 이 판이나 돈만으로 미쳐 돌아가는 이 세상에 뛰어난 인재가 있다고 한들 어디 그를 알아 볼 어느 누구 먼지 티끌 한 점이나 남아있을 것이며, 설혹 그런 인재가 있다고 한들 어마어마한 돈을 토대로 최첨단 신무기로 무장한 독사처럼 똬리를 튼 국내외 크고 작은 수많은 권력의 난마(亂麻)처럼 헝클어진 천만 길 낭떠러지 아찔한 이 부조리한 현실적 장벽을 무슨 수로 어찌 넘을 수 있을 것인지 싶지만 말이다.

    그날 홍인은 제자들에게 공경심(恭敬心)을 내도록 그 게송을 설명해 준다. 그 게송을 본 제자들은 다들 훌륭하다고 말하며 스승의 말을 받들어 그 게송을 외운다.

    처소로 돌아온 홍인은 제자 신수상좌가 그 게송을 적어놓은 것이라고 넌지시 짐작하고는 그를 부른다. 방안으로 들어온 제자 신수를 바라보며 홍인이 말한다.

    “그대가 이 게송을 지은 것인가? 만약 그대가 지었다면 나의 법을 얻을 것이다.”

    “죄송스럽습니다. 제가 지었습니다. 그러나 감히 조사(祖師)의 자리를 구함이 아니오니 스승님께서는 자비로 살펴주십시오. 과연 제자가 작은 지혜라도 있어서 큰 뜻을 알았습니까?”

    스승 홍인의 말을 듣고 신수는 이렇게 조용히 묻는다.

    “그대의 이 게송은 다만 문 앞에 이르렀을 뿐, 아직 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범부들이 이 게송을 의지하여 수행하면 타락하지는 않겠으나 이런 견해를 가지고 위없는 진리를 찾는다면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문 안으로 들어와야만 자기의 본성을 보느니라. 그대는 다시 돌아가서 며칠 동안 잘 생각하여 다시 한 게송을 지어서 나에게 와서 바치도록 하여라. 만약 문 안에 들어와서 자기 본성을 보았다면 마땅히 가사와 법을 그대에게 부촉(付囑)하리라.”

    홍인은 다른 제자들에게는 이 게송을 칭찬하며 모두 외우도록 하였으나, 정작 이 게송을 지은 제자 신수는 조용히 불러 그 한계를 분명하게 짚어 주었던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신수는 스승 홍인의 방을 물러 나온다. 스승 홍인은 신수에게 문밖과 문안을 제시하며 문안으로 들어와야만 자기 본성을 볼 수 있다(見自本性)고 했다. 문밖과 문안 그리고 자기본성과는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신수는 돌아가서 수없이 반문하며 게송을 다시 지으려 하였으나 쉬이 짓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방앗간 앞으로 한 동자가 신수가 지은 게송을 외우며 지나갔다.

     

     

     

     

     


    마침 그 방앗간 안에서는 혜능이 방아를 찧고 있었다. 혜능은 이 게송을 듣고 무엇인지 궁금하여 밖으로 뛰쳐나와 동자를 붙잡고 물었다.

    “지금 외우는 것은 무슨 게송인가요?”

    “아직도 모른단 말이오. 이것은 신수상좌의 게송이오.”

    동자는 혜능에게 스승 홍인이 게송을 지어 바치라는 일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혜능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아! 그랬군요. 나는 여기서 방아 찧기를 여덟 달 동안 했으나 아직 스승 홍인이 계시는 조사당 앞에는 가보지를 못했소. 바라건대 선배께서는 나를 남쪽 복도로 인도하여 그 게송을 예배하게 해주시오. 그렇게 하여 내생에 인연을 맺어(結來生緣) 부처님 나라에 태어나기를 바랍니다.”

    그 말을 들은 동자는 그 즉시 혜능을 이끌고 마침내 신수의 게송이 적혀진 남쪽 복도에 이른다. 혜능은 게송을 바라보고 공손히 예배를 하고 나서 글자를 모르는 까닭에 글을 아는 옆 사람에게 읽어 주기를 청한다. 옆 사람이 게송을 읽어 주자 그것을 들은 혜능은 깊은 뜻이라도 파악하는 듯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문득 그에게 말한다.

    “부탁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저 또한 한 게송을 지금 지었는데 글자를 쓸 줄 모르니 대신 저 서쪽 벽에 제 게송을 글자로 옮겨 적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옆 사람은 글자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게송을 지었느냐 싶었던지 의아한 눈빛으로 꾀죄죄한 혜능을 바라보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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